뮌헨 올림픽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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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뮌헨 올림픽 참사는 1972년 9월 5일,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 '검은 9월단'이 뮌헨 올림픽 선수촌 내 이스라엘 선수 숙소에 침입하여 선수와 코치 등 11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검은 9월단은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며 인질극을 벌였으나, 서독 정부의 미숙한 대처와 이스라엘의 강경한 입장으로 인해 인질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이 사건은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경기 중단을 초래했으며, 이후 이스라엘은 모사드를 통해 관련자 암살 작전을 수행했다. 또한,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테러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대테러 부대 창설 및 장비 도입, 국제 협력 강화 등 대테러 역량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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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이스라엘 - 로드 공항 사건
1972년 일본 적군이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의 의뢰를 받아 로드 국제공항에서 무차별 총격 테러를 일으켜 승객과 공항 이용객 26명이 사망하고 73명이 중경상을 입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공항 보안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
뮌헨 올림픽 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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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명칭 | 뮌헨 올림픽 참사 |
부분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
목표 | 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
위치 | 서독 뮌헨 |
날짜 | 1972년 9월 5일 - 6일 |
시간 | 오전 4시 31분 – 오전 12시 04분 |
시간대 | UTC+1 |
유형 | 인질극 총기 난사 학살 |
피해 | |
사망자 | 17명 (피해자 12명, 가해자 5명) |
사망자 목록 | 참조 |
이스라엘 코치 | 6명 |
이스라엘 선수 | 5명 |
서독 경찰 | 1명 |
검은 9월 단원 | 5명 |
범인 | |
단체 | 검은 9월단 |
관련 정보 | |
캠페인 | 팔레스타인 반란, 남부 레바논 |
관련 사건 | 뮌헨 올림픽 참사 뮌헨 올림픽 참사 이후 모사드 암살 작전 1972년 공습 |
배후 | 알리 하산 살라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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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의 경위
사건의 경위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선수촌 침입, 범행 성명, 그리고 총격전이다.
이 사건은 저격 실패로 인해 피해가 확대되었고, 주요 원인으로는 정보 부족이 있었다. 초기 독일 측은 테러리스트들의 숫자를 5명으로 오인했으나 실제로는 8명이었다.[54] 나중에 테러리스트 수가 8명이라는 것을 파악했지만, 이 정보는 공항의 저격팀에 전달되지 않았다.[54]
== 선수촌 침입 ==
1972년 9월 5일 이른 아침,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검은 9월단 소속 테러리스트 8명이 올림픽 선수촌 내 이스라엘 선수 숙소에 침입했다.[21] 이들은 AKM 소총, 토카레프 권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2m 높이의 철조망을 넘어 선수촌에 잠입했다.[17]
테러리스트들은 코놀리슈트라세 31번지 건물에 들어가 레슬링 코치 모셰 바인베르그와 역도 선수 요세프 로마노를 살해하고, 다른 9명을 인질로 붙잡았다.[21] 우루과이 선수단의 증언에 따르면,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인 유세프 나잘(암호명 "토니")은 사건 발생 24시간 전에 이미 선수촌 내부에서 목격되었으나, 선수촌 직원으로 오인받아 의심을 받지 않았다.[21]
요세프 구트프로인드는 문에서 나는 수상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 테러리스트들의 침입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24] 모셰 바인베르그는 테러리스트들과 격투를 벌이다 총에 맞아 부상당했고, 인질 수색을 강요받았다.[24][28] 그는 테러리스트들을 힘이 센 선수들이 있는 곳으로 유인해 저항하려 했으나, 선수들은 잠결에 제압당했다.[28] 가드 츠오바리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모셰 바인베르그와 요세프 로마노는 테러리스트들에게 살해당했다.[29][30][24]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난민 캠프 출신으로, 지도자 루티프 아피프(암호명 "이사")와 부지도자 유세프 나잘("토니"), 아피프 아흐메드 하미드 ("파올로"), 칼리드 자와드 ("살라"), 아흐메드 시크 타아 ("아부 할라"), 모하메드 사파디 ("바드란"), 아드난 알-가셰이 ("데나위"), 자말 알-가셰이 ("사미르")로 구성되었다.[21]
== 범행 성명 ==
검은 9월단은 범행 성명을 발표하고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 양심수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다.[12] 인질범들은 일본 적군의 오카모토 고조와 울리케 마인호프, 서독 적군파의 창립자 중 한 명의 석방도 요구했다.[12] 뮌헨 주립 기록 보관소에 보관된 검은 9월의 원래 타자 영어 공보에는 328명의 이름 목록이 포함되어 있었다.[12]
인질범들은 아파트 정문 밖으로 바인베르크의 시신을 던져 자신들의 결의를 보였다.[27]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수상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협상은 없을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37] 당시 이스라엘의 공식 입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테러리스트와 협상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었다.[37]
빌리 브란트 독일 연방 총리와 한스-디트리히 겐셔 연방 내무 장관은 모사드 책임자인 츠비 자미르에게 IDF의 ''사이예레트 마트칼'' 투입을 제안했으나, 독일 당국은 바이에른 주 경찰이 위기를 처리하겠다고 주장하며 거부했다.[17][38][39] 바이에른 내무부 장관 브루노 메르크는 겐셔 및 뮌헨 경찰서장 만프레드 슈라이버와 함께 위기 관리 센터를 이끌었으나, 이스라엘이 그러한 제안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40]
뮌헨 경찰서장 만프레드 슈라이버와 바이에른 내무 장관 브루노 메르크는 납치범들과 직접 협상하여 무제한의 몸값을 제안했으나, 납치범들은 "돈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고, 우리 목숨도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며 거절했다.[95] 독일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고위 독일 관리들과의 교체를 제안했으나, 이 역시 거부되었다.[95]
아랍 연맹과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관계자들도 납치범들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24] 독일 협상가들은 "이사"가 여러 차례 마감 시한을 연장하면서 그들의 요구가 고려되고 있다고 테러리스트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24]
== 교섭 ==
독일 당국과 검은 9월단은 비행기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로 탈출하기로 합의하고, 선수촌에서 헬리콥터 2대에 나눠타고 뮌헨 공항으로 이동한 뒤 비행기를 타고 국외로 탈출하기로 했다.[12] 그러나 이는 표면상의 합의였고, 실제로는 공군기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경찰특공대와 저격수들이 범인들을 사살하고 인질을 구출할 계획이었다.[12] 인질범들은 일본 적군의 오카모토 고조를 포함하여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이 아닌 사람들, 그리고 울리케 마인호프 등 서독 적군파 창립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12] 검은 9월단의 원래 타자 영어 공보에는 328명의 이름 목록이 포함되어 있었다.[12]
인질범들은 아파트 정문 밖에 바인베르크의 시신을 던지며 협상 의지를 드러냈다.[27] 이스라엘은 협상은 없을 것이라며 단호하게 대응했다.[37] 당시 이스라엘의 공식 입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러한 협상이 향후 공격을 유도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37]
빌리 브란트 독일 연방 총리와 한스-디트리히 겐셔 연방 내무 장관은 모사드 책임자 츠비 자미르의 IDF ''사이예레트 마트칼'' 투입 제안을 거부하고 바이에른 주 경찰이 위기를 처리하겠다고 주장했다.[17][37][38][39] 바이에른 내무부 장관 브루노 메르크는 겐셔 및 뮌헨 경찰서장 만프레드 슈라이버와 함께 위기 관리 센터를 이끌었지만, 이스라엘이 그러한 제안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40] 외국 군사 개입 제안은 독일 연방 공화국의 주권 때문에 고려될 수 없었다.
존 K. 쿨리에 따르면, 인질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독일에게는 극도로 어려운 정치적 상황이었다. 뮌헨 경찰서장 만프레드 슈라이버와 바이에른 내무 장관 브루노 메르크는 납치범들에게 무제한의 몸값을 제안했고, 독일 고위 관리들과의 인질 교환도 제안했지만, 납치범들은 모두 거부했다.[95]
아랍 연맹의 이집트 고문,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이집트 위원 등이 납치범들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24] 독일 협상가들은 "이사"가 여러 차례 마감 시한을 연장하면서 요구가 고려되고 있다고 테러리스트들을 설득했다.[24] 경기는 첫 번째 선수가 살해된 지 12시간 후에 중단되었다.[12] 미국의 마라톤 선수 프랭크 쇼터는 "저기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상상해 봐. 5분마다 기관총을 든 사이코가 '지금 죽이자'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아니, 좀 기다리자'고 말해.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겠어?"라고 말했다.[41]
정오 최후통첩 만료 15분 전, 테러리스트들과 협상하여 3시간 연장되었다.[12] 올림픽 선수촌장 발터 트뢰거, 빌리 다우메, 만프레트 슈라이버, 뮌헨 경찰청장, 제20회 올림픽 경기 보안 책임자, 바이에른 내무장관 브루노 메르크, 독일 NOC 부회장이자 연방 내무장관 한스-디트리히 겐셔는 테러리스트에게 인질 교환을 제안했지만, 소용이 없었다.[12] 엘리야시브 벤-호린 이스라엘 대사는 정오 무렵 이스라엘 내각이 인질범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12] 골다 메이어는 자국민의 생명을 영원히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요구를 거부했다.[12] 벤-호린 대사는 독일 당국의 인질 구출 능력을 믿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인질극이 종료될 때까지 스포츠 경기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12][37]
위기 상황 중 독일 협상가들은 인질들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질들과 직접 접촉할 것을 요구했다. 앙드레 스피처와 케하트 쇼르가 두 명의 납치범이 총을 들이댄 채 서독 관리들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27] 슈피처가 질문에 답하려 하자, 그는 AK-47 개머리판으로 구타당하고 창가에서 끌려갔다.[27]
오후 3시 25분, 최후 통첩은 오후 5시로 연기되었다.[12] 오후 3시 38분, 진행 중인 경기가 완료된 후 올림픽 경기는 중단되었다. 테러범들은 옷을 여러 번 갈아입고 발코니에 나타났으며, 그 수는 5명으로 추정되었다.
테러범들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경찰이 접근하고 있으며 구출 작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4] 당국은 테러범들의 전기를 차단하고 언론을 올림픽 선수촌에서 철수시키지 못했다. 1970년대 초, 대테러(counter-terrorism)와 전술 경찰(tactical policing)은 테러(terrorism)에 대처하는 비교적 생소한 방식이었으며, 세계 어느 군대도 인질 사태를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부대를 보유하지 않았다.[17] 서독에는 현대적 의미의 전문 부대가 없었으며, 평시에는 내부적으로 배치될 수 없는 특수 군사 전투 부대만 있었다.[17] 뮌헨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중대한 전환점(critical juncture)이 되었고, 각국 정부가 테러를 지속적인 안보 문제로 인식하고 다양한 자원을 투입하여 이에 대처하도록 촉구했다.[17]
오후 4시 30분, 인질 구출 작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서약을 한 13명의 서독 경찰관으로 구성된 급조된 팀이 올림픽 선수촌 건물에 침투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43][44] 이들은 대테러나 인질 구출 경험이 전혀 없는 바이에른 주 경찰 소속의 일반 뮌헨 경찰관이었다.[17][43] 경찰관들은 환기구를 통해 기어 내려가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할 계획이었다. 경찰관들은 "선샤인"이라는 암호를 기다리는 위치에 자리 잡았고, 이를 들으면 공격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카메라 팀은 올림픽 선수촌의 인근 아파트에서 경찰관들의 활동을 촬영하여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했다.[43] 이로 인해 테러리스트들은 경찰의 공격 준비를 지켜보고 라디오로 들을 수 있었다.[43] "이사"가 몇몇 인질을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텔레비전 보도로 경찰의 은폐 작전이 실패하자, 경찰은 구출 작전을 중단하고 현장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43][46] 언론도 올림픽 선수촌에서 철수했다.
5시 마감 시한 직전,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과 인질들의 안전한 카이로행 비행기 탑승을 요구했으며, 그곳에서 억류자 석방을 위한 협상을 계속할 의도였다.[12] 겐셔 장관과 올림픽 선수촌장 발터 트뢰거는 인질들과 잠시 대화하기 위해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인질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이집트 수도로 비행하는 데 동의했다.[24] 트뢰거는 인질 중 몇 명, 특히 구트프로인트가 신체적 학대를 받은 흔적을 보였고, 데이비드 베르거가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위기 대응팀과의 문답 과정에서 겐셔와 트뢰거는 아파트 내부에서 "다섯" 명의 테러리스트를 봤다고 보고했다.[24] 운명적으로, "여덟" 명이 아닌 이 숫자가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독일 연방 공화국은 인질범들이 무력으로 외국 손님들을 다른 영토로 강제 이송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12] 아랍 국가 중 어느 곳도 브란트의 외교적 노력을 지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 상황에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24]
가짜 합의에 따라 검은 9월단 테러리스트들과 이스라엘 인질 아홉 명은 뮌헨 올림픽 선수촌에서 퓌르스텐펠트브루크 공군 기지에 대기 중인 항공기로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이 기동을 통해서 그들은 최후 통첩을 오후 7시까지 연장할 수 있었다. 오후 6시부터 슈라이버의 부관 게오르크 볼프와 다섯 명의 경찰관이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임을 알고 퓌르스텐펠트브루크 공군 기지에서 잠재적인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24]
오전 8시 45분경, 뮌헨 경찰 본부장은 올림픽 관계자 2명과 함께 현관에서 점거 부대 리더와 협상을 벌여, 아직 이스라엘 당국과 협의 중이라며 기한을 오후 0시까지 연장했다. 단, 석방되지 않으면 인질 2명을 사살하겠다는 조건이었다[133]。 서독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시작했지만, 골다 메이어는 이 요구를 거부함과 동시에 이스라엘 방위군 부대에 의한 사태 해결을 서독에 타진했지만, 서독 측은 자국에서 대응하겠다며 거절했다.
서독 당국은 협상에 의한 해결을 일절 단념하고, 무력만을 사용한 해결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당국 측은 점거 부대의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협상 중이다"라고 속여 여러 번 기한을 연장했다.
오후 5시경, 당국 측은 올림픽 관계자를 인질 확인을 칭하며 숙소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올림픽 관계자가 그 때 본 점거 부대의 멤버 수는 5명이었기에, 당국 측은 5명으로 단정하고 돌입 준비를 했다. 그러나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실황 중계되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점거 부대가 눈치채어 중지하게 되었다.
이후, 협상이 진행되어, 점거 부대는 비행기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로 탈출할 것을 요구했고, 당국은 이에 합의했다. 오후 10시경, 점거 부대와 인질은 숙소의 지하에서 당국이 준비한 버스로 숙소에서 200m 떨어진 초원으로 이동, 거기에서 2대의 헬리콥터로 공항까지 이동, 그 후 준비된 비행기로 갈아타고 국외로 탈출할 예정이었다[133]。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였고, 실제로는 버스로 이동하는 도중, 혹은 공항에서 범인 그룹을 저격하여, 인질을 석방할 계획이었다.
== 총격전 ==
헬리콥터가 퓌어슈텐펠트브루크(Fürstenfeldbruck) 공군 기지에 착륙한 후, 범인 2명이 준비된 비행기를 확인하고 물러날 때 저격수가 발포했지만, 범인 전원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응전하면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142] 범인들은 헬리콥터 1대를 수류탄으로 파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하여 총격전은 장시간 이어졌고, 인질 9명 전원 및 경찰관 1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결과로 종결되었다.[133]
1970년대 초, 대테러(counter-terrorism)와 전술 경찰(tactical policing)은 테러(terrorism)에 대처하는 비교적 생소한 방식이었으며, 세계 어느 군대도 인질 사태를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부대를 보유하지 않았다.[17] 서독에는 현대적 의미의 전문 부대가 없었으며, 독일 헌법에 따라 "전투원(combatant)" 신분이었기 때문에 평시에는 내부적으로 배치될 수 없는 특수 군사 전투 부대만 있었다.[17] 이러한 모든 임무는 일반 법 집행(law enforcement) 기관, 특히 독일의 법 집행(Law enforcement in Germany)에 속하는 지역 주 및 시 경찰에 위임되었다.[17]
서독의 계획은 테러리스트와 인질들을 비행기로 카이로로 수송하는 척하며 속이는 것이었다.[24][47] 테러리스트들은 헬리콥터까지 400m를 이동시켜 줄 수송 차량을 지하 주차장으로 가져올 것을 요구했고, 확인후 버스가 너무 작다고 판단하고 더 큰 버스에 탑승했는데, 이 사건은 실시간으로 촬영되었고 뉴스 사진가들에게 포착되었다.[24][48]
오후 10시 30분, 인질과 점거 부대를 태운 헬리콥터 2대가 퓌르스텐펠트브루크 공군기지(Fürstenfeldbruck)에 착륙했다. 기지에는 점거 부대를 저격하기 위해 경찰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142] 저격하는 경찰관은 H&K G3 자동 소총(돌격 소총)의 일반 경찰용 모델을 사용했다.[142] 당시 뮌헨 경찰에는 볼트 액션식 저격총인 슈타이어 SSG 69/Steyr_SSG_69영어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이를 사용하는 저격수 양성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이 사건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142] 관제탑 발코니에 3명과 활주로상에 2명이 서로 마주보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비가 불충분하고, 기내에서의 방어도 불충분했기 때문에, 경찰관들은 임무를 포기하고 항명했다.[142] 더 대규모로 중무장한 집단을 제압하려 하는 것은 5명의 경찰 저격수뿐이었다. 이때 이미 헬리콥터가 기지에 접근했기 때문에, 작전 계획을 조정할 수 없었다. 연방 국경 경비대의 내무성 연락관이었던 울리히 베게너 중위는 "이걸로 분명 작전 전체가 망가지겠군"이라고 말했다.[143]
착륙 후, 4명의 파일럿이 먼저 내리고, 점거 부대는 경찰과의 합의대로 헬리콥터 객실의 문을 열었다. 점거 부대의 리더 "이사"(아피프)와 부 리더 "토니"(나자르)는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준비된 루프트한자 독일 항공의 보잉 727에 들어갔다. 사전 계획에서는 기내에 경찰관을 배치하여 잠복할 예정이었지만, 직전의 항명 사건 때문에 기내에는 아무도 없었고, 2명은 안내역조차 없는 것을 수상하게 여겨, 헬리콥터로 달려가 도망쳤다. 2명이 동쪽 헬리콥터에 도달하려 할 때, 활주로상의 저격수 중 한 명이 발포했지만, 빗나갔고, 2명 모두 땅에 엎드렸다. 타워에 있던 저격병 2명도 발포, "이사"는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지만, 그대로 "토니"와 함께 헬리콥터까지 도달, 로터 블레이드의 그림자에 숨어 기지 타워에 농성하는 경찰 측에 응사했다. 이에 대해 경찰 측도 응전을 시작, 총격전이 벌어졌다. 지상의 저격병은 이에 개입할 수 없었다.
점거 부대는 헬리콥터에 웅크리고, 저격수로 배치되어 있던 경찰대는 장비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지원 부대를 기다리기로 했다.[133] 공항 주변에 몰려든 언론과 구경꾼으로 인한 교통 체증에 막혀 도착이 대폭 늦어진 지원 부대는, 사태가 거의 수습된 오후 11시 30분 경, 드디어 현장에 도착했다.
최종적으로 테러범 중 한 명이 수류탄으로 자폭하고 인질이 탑승한 헬리콥터가 폭발, 화염에 휩싸였다. 인질들은 양손이 뒤로 묶이고 눈가리개가 씌워진 채 수갑으로 연결되어 있어 도망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인질 9명 전원과 경찰관 1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며 사건은 종결되었다. 범인 측은 8명 중 리더를 포함한 5명이 사망했고, 나머지 3명은 도주를 시도했으나 이후 체포되었다.[133] 하지만 이 3명은 같은 해 10월 29일에 발생한 루프트한자 615편 항공기 납치 사건/Lufthansa Flight 615영어으로 석방되었다.[144]
== 그 후 ==
이스라엘에서 올림픽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나, 다음날 이스라엘 선수단의 추모식이 진행되며 올림픽은 34시간 만에 재개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올림픽기가 처음으로 조기가 게양되었다.[70]9월 6일, 8만 명의 관중과 3천 명의 운동선수가 참석한 추모식이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렸다.[71] 추모식 동안, 브란트의 요청에 따라 올림픽기가 다른 참가 국가들의 국기와 함께 반기로 게양되었으나, 10개의 아랍 국가들은 자국의 국기가 반기로 게양되는 것에 반대했고, 이 명령은 철회되었다.[73]
서독과 헝가리의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올림픽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8만 명의 사람들 중 다수가 소음을 내는 기구를 들고 흔들었지만, "17명 사망, 벌써 잊혀졌나?"라는 현수막을 펼치자, 보안 요원들은 그 표지판을 제거하고 책임자들을 경기장에서 내쫓았다.[18] 빌리 다우메 뮌헨 조직위원장은 처음에 남은 경기 취소를 원했지만, 에이버리 브런디지 IOC 위원장 등이 사건이 올림픽을 중단하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경기를 계속 진행하려 했고, 결국 그들의 뜻이 관철되었다.[18] 브런디지는 "올림픽은 계속되어야 하며, 우리는... 그리고 우리는 올림픽을 깨끗하고, 순수하며, 정직하게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라고 말했다.[74] 이 결정은 이스라엘 정부와 이스라엘 올림픽 대표팀 단장인 슈무엘 랄킨의 지지를 받았다.[75]
추모식 이후, 이스라엘 대표팀의 나머지 선수들은 경기를 포기하고 뮌헨을 떠났으며, 모든 유대인 운동선수들은 경호를 받았다.[76] 이미 경기를 마친 미국의 수영 스타 마크 스피츠는 인질 사태 중에 뮌헨을 떠났다.[76] 이집트 대표팀은 9월 7일에 경기를 떠났고, 보복이 두려워했다고 밝혔다.[76] 필리핀과 알제리 대표팀도 경기를 떠났으며, 네덜란드와 노르웨이 대표팀의 일부 선수들도 떠났다.[76] 미국의 마라톤 선수 케니 무어는 이 사건에 대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기고하며, 네덜란드 장거리 선수 요스 헤르먼스의 말을 인용하여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는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누군가 파티에 와서 사람들에게 총을 쏜다면, 어떻게 거기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라고 전했다.[77] 네덜란드 단거리 육상 선수 윌마 반 골은 200m 스프린트 준결승에 진출했고, 그녀가 예선에서 기록한 시간은 최종 금메달리스트인 동독의 레나테 슈테허보다 빨랐으나,[78] 이스라엘 희생자들을 동정하며 경기를 포기했다.[79]
다섯 명의 팔레스타인 공격자, 아피프, 나잘, 시크 타, 하미드, 자와드의 시신은 리비아로 인도되어 그곳에서 영웅적인 장례를 치르고 완전한 군사적 예우를 받으며 매장되었다.[63] 9월 8일, 이스라엘 비행기는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시리아와 레바논의 PLO 기지 10곳을 폭격하여 200명의 무장세력과 11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전해졌다.[64][65]
생존한 검은 9월단의 세 명의 총격범은 체포되어 재판을 위해 뮌헨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10월 29일, 루프트한자 615편이 납치되었고 뮌헨 공격자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13][66] 서독은 이들을 즉시 석방했고, 이들은 리비아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13][67]
인질극 이후, 경기 중단은 현대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3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70]
일부 희생자 가족들은 IOC에 선수들을 위한 영구 기념관을 세울 것을 요청했으나, IOC는 거절했다.[81] IOC는 학살 40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이스라엘 희생자들을 기리는 1분 묵념을 하자는 국제적인 캠페인을 거부했다.[82][83]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개막식에 2005년 7월 7일 런던 폭탄 테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식이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묵념이 "부적절하다"고 말했다.[84] 2014년에 IOC는 살해된 이스라엘 선수들을 위한 기념관에 25만 달러를 기부하기로 합의했다.[85] 44년[86] 만에, IOC는 2016년 8월 4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선수촌에서 뮌헨 학살 희생자들을 처음으로 기념했다.[87] 2020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50주년이 되기 1년 전인 2021년 개막식에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16]
뮌헨 올림픽 스타디움 밖에는, 경기장과 이전 올림픽 선수촌을 연결하는 다리에 돌판 형태로 사망자들을 위한 기념관이 있으며, 코놀리슈트라세 31번지의 이전 숙소 정문 밖에 기념판이 있다. 1999년 10월 15일, 시드니 올림픽 스타디움 밖에 있는 큰 조명탑 중 하나에 기념 현판이 공개되었다.[88][89]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공개적으로 이 공격을 비난한 유일한 아랍 국가의 지도자였으며, "병든 정신에 의해 저질러진 문명에 대한 야만적인 범죄"라고 불렀다.[95]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국가 애도일 선포 또는 선수들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등 몇 가지 가능한 미국의 대응 방안을 비공개적으로 논의했으나, 대신 유엔에 국제 테러에 대처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하기로 결정했다.[96]
생존한 세 명의 테러리스트 중 두 명인 모하메드 사파디와 아드난 알-가셰이는 ''신의 분노 작전''의 일환으로 모사드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108] 그러나 이 주장은 반박되었는데, 알-가셰이는 1970년대에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사파디는 1980년대 초 레바논에서 팔랑헤당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18]2. 1. 선수촌 침입
1972년 9월 5일 이른 아침,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검은 9월단 소속 테러리스트 8명이 올림픽 선수촌 내 이스라엘 선수 숙소에 침입했다.[21] 이들은 AKM 소총, 토카레프 권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2m 높이의 철조망을 넘어 선수촌에 잠입했다.[17]
테러리스트들은 코놀리슈트라세 31번지 건물에 들어가 레슬링 코치 모셰 바인베르그와 역도 선수 요세프 로마노를 살해하고, 다른 9명을 인질로 붙잡았다.[21] 우루과이 선수단의 증언에 따르면,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인 유세프 나잘(암호명 "토니")은 사건 발생 24시간 전에 이미 선수촌 내부에서 목격되었으나, 선수촌 직원으로 오인받아 의심을 받지 않았다.[21]
요세프 구트프로인드는 문에서 나는 수상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 테러리스트들의 침입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24] 모셰 바인베르그는 테러리스트들과 격투를 벌이다 총에 맞아 부상당했고, 인질 수색을 강요받았다.[24][28] 그는 테러리스트들을 힘이 센 선수들이 있는 곳으로 유인해 저항하려 했으나, 선수들은 잠결에 제압당했다.[28] 가드 츠오바리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모셰 바인베르그와 요세프 로마노는 테러리스트들에게 살해당했다.[29][30][24]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난민 캠프 출신으로, 지도자 루티프 아피프(암호명 "이사")와 부지도자 유세프 나잘("토니"), 아피프 아흐메드 하미드 ("파올로"), 칼리드 자와드 ("살라"), 아흐메드 시크 타아 ("아부 할라"), 모하메드 사파디 ("바드란"), 아드난 알-가셰이 ("데나위"), 자말 알-가셰이 ("사미르")로 구성되었다.[21]
2. 2. 범행 성명
검은 9월단은 범행 성명을 발표하고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 양심수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다.[12] 인질범들은 일본 적군의 오카모토 고조와 울리케 마인호프, 서독 적군파의 창립자 중 한 명의 석방도 요구했다.[12] 뮌헨 주립 기록 보관소에 보관된 검은 9월의 원래 타자 영어 공보에는 328명의 이름 목록이 포함되어 있었다.[12]
인질범들은 아파트 정문 밖으로 바인베르크의 시신을 던져 자신들의 결의를 보였다.[27]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수상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협상은 없을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37] 당시 이스라엘의 공식 입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테러리스트와 협상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었다.[37]
빌리 브란트 독일 연방 총리와 한스-디트리히 겐셔 연방 내무 장관은 모사드 책임자인 츠비 자미르에게 IDF의 ''사이예레트 마트칼'' 투입을 제안했으나, 독일 당국은 바이에른 주 경찰이 위기를 처리하겠다고 주장하며 거부했다.[17][38][39] 바이에른 내무부 장관 브루노 메르크는 겐셔 및 뮌헨 경찰서장 만프레드 슈라이버와 함께 위기 관리 센터를 이끌었으나, 이스라엘이 그러한 제안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40]
뮌헨 경찰서장 만프레드 슈라이버와 바이에른 내무 장관 브루노 메르크는 납치범들과 직접 협상하여 무제한의 몸값을 제안했으나, 납치범들은 "돈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고, 우리 목숨도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며 거절했다.[95] 독일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고위 독일 관리들과의 교체를 제안했으나, 이 역시 거부되었다.[95]
아랍 연맹과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관계자들도 납치범들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24] 독일 협상가들은 "이사"가 여러 차례 마감 시한을 연장하면서 그들의 요구가 고려되고 있다고 테러리스트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24]
2. 3. 교섭
독일 당국과 검은 9월단은 비행기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로 탈출하기로 합의하고, 선수촌에서 헬리콥터 2대에 나눠타고 뮌헨 공항으로 이동한 뒤 비행기를 타고 국외로 탈출하기로 했다.[12] 그러나 이는 표면상의 합의였고, 실제로는 공군기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경찰특공대와 저격수들이 범인들을 사살하고 인질을 구출할 계획이었다.[12] 인질범들은 일본 적군의 오카모토 고조를 포함하여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이 아닌 사람들, 그리고 울리케 마인호프 등 서독 적군파 창립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12] 검은 9월단의 원래 타자 영어 공보에는 328명의 이름 목록이 포함되어 있었다.[12]
인질범들은 아파트 정문 밖에 바인베르크의 시신을 던지며 협상 의지를 드러냈다.[27] 이스라엘은 협상은 없을 것이라며 단호하게 대응했다.[37] 당시 이스라엘의 공식 입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러한 협상이 향후 공격을 유도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37]
빌리 브란트 독일 연방 총리와 한스-디트리히 겐셔 연방 내무 장관은 모사드 책임자 츠비 자미르의 IDF ''사이예레트 마트칼'' 투입 제안을 거부하고 바이에른 주 경찰이 위기를 처리하겠다고 주장했다.[17][37][38][39] 바이에른 내무부 장관 브루노 메르크는 겐셔 및 뮌헨 경찰서장 만프레드 슈라이버와 함께 위기 관리 센터를 이끌었지만, 이스라엘이 그러한 제안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40] 외국 군사 개입 제안은 독일 연방 공화국의 주권 때문에 고려될 수 없었다.
존 K. 쿨리에 따르면, 인질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독일에게는 극도로 어려운 정치적 상황이었다. 뮌헨 경찰서장 만프레드 슈라이버와 바이에른 내무 장관 브루노 메르크는 납치범들에게 무제한의 몸값을 제안했고, 독일 고위 관리들과의 인질 교환도 제안했지만, 납치범들은 모두 거부했다.[95]
아랍 연맹의 이집트 고문,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이집트 위원 등이 납치범들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24] 독일 협상가들은 "이사"가 여러 차례 마감 시한을 연장하면서 요구가 고려되고 있다고 테러리스트들을 설득했다.[24] 경기는 첫 번째 선수가 살해된 지 12시간 후에 중단되었다.[12] 미국의 마라톤 선수 프랭크 쇼터는 "저기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상상해 봐. 5분마다 기관총을 든 사이코가 '지금 죽이자'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아니, 좀 기다리자'고 말해.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겠어?"라고 말했다.[41]
정오 최후통첩 만료 15분 전, 테러리스트들과 협상하여 3시간 연장되었다.[12] 올림픽 선수촌장 발터 트뢰거, 빌리 다우메, 만프레트 슈라이버, 뮌헨 경찰청장, 제20회 올림픽 경기 보안 책임자, 바이에른 내무장관 브루노 메르크, 독일 NOC 부회장이자 연방 내무장관 한스-디트리히 겐셔는 테러리스트에게 인질 교환을 제안했지만, 소용이 없었다.[12] 엘리야시브 벤-호린 이스라엘 대사는 정오 무렵 이스라엘 내각이 인질범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12] 골다 메이어는 자국민의 생명을 영원히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요구를 거부했다.[12] 벤-호린 대사는 독일 당국의 인질 구출 능력을 믿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인질극이 종료될 때까지 스포츠 경기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12][37]
위기 상황 중 독일 협상가들은 인질들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질들과 직접 접촉할 것을 요구했다. 앙드레 스피처와 케하트 쇼르가 두 명의 납치범이 총을 들이댄 채 서독 관리들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27] 슈피처가 질문에 답하려 하자, 그는 AK-47 개머리판으로 구타당하고 창가에서 끌려갔다.[27]
오후 3시 25분, 최후 통첩은 오후 5시로 연기되었다.[12] 오후 3시 38분, 진행 중인 경기가 완료된 후 올림픽 경기는 중단되었다. 테러범들은 옷을 여러 번 갈아입고 발코니에 나타났으며, 그 수는 5명으로 추정되었다.
테러범들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경찰이 접근하고 있으며 구출 작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4] 당국은 테러범들의 전기를 차단하고 언론을 올림픽 선수촌에서 철수시키지 못했다. 1970년대 초, 대테러(counter-terrorism)와 전술 경찰(tactical policing)은 테러(terrorism)에 대처하는 비교적 생소한 방식이었으며, 세계 어느 군대도 인질 사태를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부대를 보유하지 않았다.[17] 서독에는 현대적 의미의 전문 부대가 없었으며, 평시에는 내부적으로 배치될 수 없는 특수 군사 전투 부대만 있었다.[17] 뮌헨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중대한 전환점(critical juncture)이 되었고, 각국 정부가 테러를 지속적인 안보 문제로 인식하고 다양한 자원을 투입하여 이에 대처하도록 촉구했다.[17]
오후 4시 30분, 인질 구출 작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서약을 한 13명의 서독 경찰관으로 구성된 급조된 팀이 올림픽 선수촌 건물에 침투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43][44] 이들은 대테러나 인질 구출 경험이 전혀 없는 바이에른 주 경찰 소속의 일반 뮌헨 경찰관이었다.[17][43] 경찰관들은 환기구를 통해 기어 내려가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할 계획이었다. 경찰관들은 "선샤인"이라는 암호를 기다리는 위치에 자리 잡았고, 이를 들으면 공격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카메라 팀은 올림픽 선수촌의 인근 아파트에서 경찰관들의 활동을 촬영하여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했다.[43] 이로 인해 테러리스트들은 경찰의 공격 준비를 지켜보고 라디오로 들을 수 있었다.[43] "이사"가 몇몇 인질을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텔레비전 보도로 경찰의 은폐 작전이 실패하자, 경찰은 구출 작전을 중단하고 현장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43][46] 언론도 올림픽 선수촌에서 철수했다.
5시 마감 시한 직전,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과 인질들의 안전한 카이로행 비행기 탑승을 요구했으며, 그곳에서 억류자 석방을 위한 협상을 계속할 의도였다.[12] 겐셔 장관과 올림픽 선수촌장 발터 트뢰거는 인질들과 잠시 대화하기 위해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인질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이집트 수도로 비행하는 데 동의했다.[24] 트뢰거는 인질 중 몇 명, 특히 구트프로인트가 신체적 학대를 받은 흔적을 보였고, 데이비드 베르거가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위기 대응팀과의 문답 과정에서 겐셔와 트뢰거는 아파트 내부에서 "다섯" 명의 테러리스트를 봤다고 보고했다.[24] 운명적으로, "여덟" 명이 아닌 이 숫자가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독일 연방 공화국은 인질범들이 무력으로 외국 손님들을 다른 영토로 강제 이송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12] 아랍 국가 중 어느 곳도 브란트의 외교적 노력을 지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 상황에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24]
가짜 합의에 따라 검은 9월단 테러리스트들과 이스라엘 인질 아홉 명은 뮌헨 올림픽 선수촌에서 퓌르스텐펠트브루크 공군 기지에 대기 중인 항공기로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이 기동을 통해서 그들은 최후 통첩을 오후 7시까지 연장할 수 있었다. 오후 6시부터 슈라이버의 부관 게오르크 볼프와 다섯 명의 경찰관이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임을 알고 퓌르스텐펠트브루크 공군 기지에서 잠재적인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24]
오전 8시 45분경, 뮌헨 경찰 본부장은 올림픽 관계자 2명과 함께 현관에서 점거 부대 리더와 협상을 벌여, 아직 이스라엘 당국과 협의 중이라며 기한을 오후 0시까지 연장했다. 단, 석방되지 않으면 인질 2명을 사살하겠다는 조건이었다[133]。 서독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시작했지만, 골다 메이어는 이 요구를 거부함과 동시에 이스라엘 방위군 부대에 의한 사태 해결을 서독에 타진했지만, 서독 측은 자국에서 대응하겠다며 거절했다.
서독 당국은 협상에 의한 해결을 일절 단념하고, 무력만을 사용한 해결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당국 측은 점거 부대의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협상 중이다"라고 속여 여러 번 기한을 연장했다.
오후 5시경, 당국 측은 올림픽 관계자를 인질 확인을 칭하며 숙소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올림픽 관계자가 그 때 본 점거 부대의 멤버 수는 5명이었기에, 당국 측은 5명으로 단정하고 돌입 준비를 했다. 그러나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실황 중계되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점거 부대가 눈치채어 중지하게 되었다.
이후, 협상이 진행되어, 점거 부대는 비행기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로 탈출할 것을 요구했고, 당국은 이에 합의했다. 오후 10시경, 점거 부대와 인질은 숙소의 지하에서 당국이 준비한 버스로 숙소에서 200m 떨어진 초원으로 이동, 거기에서 2대의 헬리콥터로 공항까지 이동, 그 후 준비된 비행기로 갈아타고 국외로 탈출할 예정이었다[133]。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였고, 실제로는 버스로 이동하는 도중, 혹은 공항에서 범인 그룹을 저격하여, 인질을 석방할 계획이었다.
2. 4. 총격전
헬리콥터가 퓌어슈텐펠트브루크(Fürstenfeldbruck) 공군 기지에 착륙한 후, 범인 2명이 준비된 비행기를 확인하고 물러날 때 저격수가 발포했지만, 범인 전원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응전하면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142] 범인들은 헬리콥터 1대를 수류탄으로 파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하여 총격전은 장시간 이어졌고, 인질 9명 전원 및 경찰관 1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결과로 종결되었다.[133]
1970년대 초, 대테러(counter-terrorism)와 전술 경찰(tactical policing)은 테러(terrorism)에 대처하는 비교적 생소한 방식이었으며, 세계 어느 군대도 인질 사태를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부대를 보유하지 않았다.[17] 서독에는 현대적 의미의 전문 부대가 없었으며, 독일 헌법에 따라 "전투원(combatant)" 신분이었기 때문에 평시에는 내부적으로 배치될 수 없는 특수 군사 전투 부대만 있었다.[17] 이러한 모든 임무는 일반 법 집행(law enforcement) 기관, 특히 독일의 법 집행(Law enforcement in Germany)에 속하는 지역 주 및 시 경찰에 위임되었다.[17]
서독의 계획은 테러리스트와 인질들을 비행기로 카이로로 수송하는 척하며 속이는 것이었다.[24][47] 테러리스트들은 헬리콥터까지 400m를 이동시켜 줄 수송 차량을 지하 주차장으로 가져올 것을 요구했고, 확인후 버스가 너무 작다고 판단하고 더 큰 버스에 탑승했는데, 이 사건은 실시간으로 촬영되었고 뉴스 사진가들에게 포착되었다.[24][48]
오후 10시 30분, 인질과 점거 부대를 태운 헬리콥터 2대가 퓌르스텐펠트브루크 공군기지(Fürstenfeldbruck)에 착륙했다. 기지에는 점거 부대를 저격하기 위해 경찰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142] 저격하는 경찰관은 H&K G3 자동 소총(돌격 소총)의 일반 경찰용 모델을 사용했다.[142] 당시 뮌헨 경찰에는 볼트 액션식 저격총인 슈타이어 SSG 69/Steyr_SSG_69영어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이를 사용하는 저격수 양성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이 사건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142] 관제탑 발코니에 3명과 활주로상에 2명이 서로 마주보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비가 불충분하고, 기내에서의 방어도 불충분했기 때문에, 경찰관들은 임무를 포기하고 항명했다.[142] 더 대규모로 중무장한 집단을 제압하려 하는 것은 5명의 경찰 저격수뿐이었다. 이때 이미 헬리콥터가 기지에 접근했기 때문에, 작전 계획을 조정할 수 없었다. 연방 국경 경비대의 내무성 연락관이었던 울리히 베게너 중위는 "이걸로 분명 작전 전체가 망가지겠군"이라고 말했다.[143]
착륙 후, 4명의 파일럿이 먼저 내리고, 점거 부대는 경찰과의 합의대로 헬리콥터 객실의 문을 열었다. 점거 부대의 리더 "이사"(아피프)와 부 리더 "토니"(나자르)는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준비된 루프트한자 독일 항공의 보잉 727에 들어갔다. 사전 계획에서는 기내에 경찰관을 배치하여 잠복할 예정이었지만, 직전의 항명 사건 때문에 기내에는 아무도 없었고, 2명은 안내역조차 없는 것을 수상하게 여겨, 헬리콥터로 달려가 도망쳤다. 2명이 동쪽 헬리콥터에 도달하려 할 때, 활주로상의 저격수 중 한 명이 발포했지만, 빗나갔고, 2명 모두 땅에 엎드렸다. 타워에 있던 저격병 2명도 발포, "이사"는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지만, 그대로 "토니"와 함께 헬리콥터까지 도달, 로터 블레이드의 그림자에 숨어 기지 타워에 농성하는 경찰 측에 응사했다. 이에 대해 경찰 측도 응전을 시작, 총격전이 벌어졌다. 지상의 저격병은 이에 개입할 수 없었다.
점거 부대는 헬리콥터에 웅크리고, 저격수로 배치되어 있던 경찰대는 장비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지원 부대를 기다리기로 했다.[133] 공항 주변에 몰려든 언론과 구경꾼으로 인한 교통 체증에 막혀 도착이 대폭 늦어진 지원 부대는, 사태가 거의 수습된 오후 11시 30분 경, 드디어 현장에 도착했다.
최종적으로 테러범 중 한 명이 수류탄으로 자폭하고 인질이 탑승한 헬리콥터가 폭발, 화염에 휩싸였다. 인질들은 양손이 뒤로 묶이고 눈가리개가 씌워진 채 수갑으로 연결되어 있어 도망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인질 9명 전원과 경찰관 1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며 사건은 종결되었다. 범인 측은 8명 중 리더를 포함한 5명이 사망했고, 나머지 3명은 도주를 시도했으나 이후 체포되었다.[133] 하지만 이 3명은 같은 해 10월 29일에 발생한 루프트한자 615편 항공기 납치 사건/Lufthansa Flight 615영어으로 석방되었다.[144]
2. 5. 그 후
이스라엘에서 올림픽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나, 다음날 이스라엘 선수단의 추모식이 진행되며 올림픽은 34시간 만에 재개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올림픽기가 처음으로 조기가 게양되었다.[70]9월 6일, 8만 명의 관중과 3천 명의 운동선수가 참석한 추모식이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렸다.[71] 추모식 동안, 브란트의 요청에 따라 올림픽기가 다른 참가 국가들의 국기와 함께 반기로 게양되었으나, 10개의 아랍 국가들은 자국의 국기가 반기로 게양되는 것에 반대했고, 이 명령은 철회되었다.[73]
서독과 헝가리의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올림픽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8만 명의 사람들 중 다수가 소음을 내는 기구를 들고 흔들었지만, "17명 사망, 벌써 잊혀졌나?"라는 현수막을 펼치자, 보안 요원들은 그 표지판을 제거하고 책임자들을 경기장에서 내쫓았다.[18] 빌리 다우메 뮌헨 조직위원장은 처음에 남은 경기 취소를 원했지만, 에이버리 브런디지 IOC 위원장 등이 사건이 올림픽을 중단하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경기를 계속 진행하려 했고, 결국 그들의 뜻이 관철되었다.[18] 브런디지는 "올림픽은 계속되어야 하며, 우리는... 그리고 우리는 올림픽을 깨끗하고, 순수하며, 정직하게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라고 말했다.[74] 이 결정은 이스라엘 정부와 이스라엘 올림픽 대표팀 단장인 슈무엘 랄킨의 지지를 받았다.[75]
추모식 이후, 이스라엘 대표팀의 나머지 선수들은 경기를 포기하고 뮌헨을 떠났으며, 모든 유대인 운동선수들은 경호를 받았다.[76] 이미 경기를 마친 미국의 수영 스타 마크 스피츠는 인질 사태 중에 뮌헨을 떠났다.[76] 이집트 대표팀은 9월 7일에 경기를 떠났고, 보복이 두려워했다고 밝혔다.[76] 필리핀과 알제리 대표팀도 경기를 떠났으며, 네덜란드와 노르웨이 대표팀의 일부 선수들도 떠났다.[76] 미국의 마라톤 선수 케니 무어는 이 사건에 대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기고하며, 네덜란드 장거리 선수 요스 헤르먼스의 말을 인용하여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는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누군가 파티에 와서 사람들에게 총을 쏜다면, 어떻게 거기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라고 전했다.[77] 네덜란드 단거리 육상 선수 윌마 반 골은 200m 스프린트 준결승에 진출했고, 그녀가 예선에서 기록한 시간은 최종 금메달리스트인 동독의 레나테 슈테허보다 빨랐으나,[78] 이스라엘 희생자들을 동정하며 경기를 포기했다.[79]
다섯 명의 팔레스타인 공격자, 아피프, 나잘, 시크 타, 하미드, 자와드의 시신은 리비아로 인도되어 그곳에서 영웅적인 장례를 치르고 완전한 군사적 예우를 받으며 매장되었다.[63] 9월 8일, 이스라엘 비행기는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시리아와 레바논의 PLO 기지 10곳을 폭격하여 200명의 무장세력과 11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전해졌다.[64][65]
생존한 검은 9월단의 세 명의 총격범은 체포되어 재판을 위해 뮌헨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10월 29일, 루프트한자 615편이 납치되었고 뮌헨 공격자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13][66] 서독은 이들을 즉시 석방했고, 이들은 리비아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13][67]
인질극 이후, 경기 중단은 현대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3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70]
일부 희생자 가족들은 IOC에 선수들을 위한 영구 기념관을 세울 것을 요청했으나, IOC는 거절했다.[81] IOC는 학살 40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이스라엘 희생자들을 기리는 1분 묵념을 하자는 국제적인 캠페인을 거부했다.[82][83]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개막식에 2005년 7월 7일 런던 폭탄 테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식이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묵념이 "부적절하다"고 말했다.[84] 2014년에 IOC는 살해된 이스라엘 선수들을 위한 기념관에 25만 달러를 기부하기로 합의했다.[85] 44년[86] 만에, IOC는 2016년 8월 4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선수촌에서 뮌헨 학살 희생자들을 처음으로 기념했다.[87] 2020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50주년이 되기 1년 전인 2021년 개막식에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16]
뮌헨 올림픽 스타디움 밖에는, 경기장과 이전 올림픽 선수촌을 연결하는 다리에 돌판 형태로 사망자들을 위한 기념관이 있으며, 코놀리슈트라세 31번지의 이전 숙소 정문 밖에 기념판이 있다. 1999년 10월 15일, 시드니 올림픽 스타디움 밖에 있는 큰 조명탑 중 하나에 기념 현판이 공개되었다.[88][89]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공개적으로 이 공격을 비난한 유일한 아랍 국가의 지도자였으며, "병든 정신에 의해 저질러진 문명에 대한 야만적인 범죄"라고 불렀다.[95]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국가 애도일 선포 또는 선수들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등 몇 가지 가능한 미국의 대응 방안을 비공개적으로 논의했으나, 대신 유엔에 국제 테러에 대처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하기로 결정했다.[96]
생존한 세 명의 테러리스트 중 두 명인 모하메드 사파디와 아드난 알-가셰이는 ''신의 분노 작전''의 일환으로 모사드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108] 그러나 이 주장은 반박되었는데, 알-가셰이는 1970년대에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사파디는 1980년대 초 레바논에서 팔랑헤당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18][109] 2022년, 사파디와 매우 흡사한 남성이 학살 50주년을 기념하는 독일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했다. 세 번째 생존자인 자말 알-가셰이는 1999년까지 생존해 있었으며, 북아프리카나 시리아에 은신해 있었고, 여전히 이스라엘의 보복을 두려워한다고 주장했다.[110]
학살을 계획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중, 공격이 자신의 아이디어라고 주장한 아부 다우드만이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1] 1977년 1월, 아부 다우드는 프랑스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나,[112] 프랑스 정부는 서독의 인도 요청을 거부하고 그를 알제리로 가는 비행기에 태웠다.[112] 다우드는 이스라엘이 마무드 아바스가 작전의 자금 제공자임을 알았다면,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다.[113] 2006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뮌헨''이 개봉하는 동안, ''슈피겔''은 뮌헨 학살에 관해 다우드를 인터뷰했고, 그는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사과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117] 다우드는 2010년 7월 3일,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신부전으로 사망했다.[118]
서독 당국은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조사나 검증을 하지 않았다.[133] 그러나 서독 정부는 이 사건의 결과로 1972년 9월 연방 국경 경비대 산하 대테러 특수부대로 "제9 국경 경비대대(GSG-9)"를 창설했다. GSG-9는 1977년 루프트한자 181편 납치 사건에 투입되어 SAS의 지원 하에 납치된 181편 (보잉 737-200)에 강행 돌입하여 범인 4명 중 3명을 사살하고 1명을 체포했다.
또한 저격 실패의 교훈을 받아 서독 당국은 H&K사에 PSG-1을, 발터사에 WA2000 개발을 의뢰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선진국들은 장거리 저격이 가능한 .50구경(0.50 인치=12.7mm) 클래스의 대구경 라이플 개발을 시작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후 대회에서는 선수촌의 경비가 강화되어 관계자 외의 출입을 엄격히 규제하게 되었다.[146]
3. 독일 측의 실수 및 교훈
당시 독일 경찰에는 대테러 부대가 없었기 때문에, 올림픽 선수촌 진압 작전에는 훈련받지 않은 일반 경찰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 진압 시도는 언론에 의해 생중계되었고, 검은 9월단은 TV를 통해 이를 파악하여 작전이 노출되었다. 결국 독일 경찰은 작전을 취소했다.
공항에서의 진압 작전에서도 많은 실수가 발생했다. 보잉 727기에서 대기 중이던 경찰들은 테러리스트들이 수류탄으로 비행기를 폭파시킬 것을 우려하여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다. 헬리콥터들은 관제탑 저격수들에게 좋은 시야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착륙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관제탑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착륙하여 저격수들의 작전 수행에 지장을 주었다.
저격수들은 스코프나 야시경이 없는 헤클러&코흐 G3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저격용으로 부적합했다. 또한 저격수 2명은 관제탑 저격수들의 사선 상에 있었다. 독일 헌법상 제약으로 평시에는 독일군의 독일 국내 활동이 인정되지 않은 것도 한 원인이었다.
독일 정부는 이 사건을 교훈 삼아 대테러 특수부대인 국경경비대 제9그룹(GSG-9)을 창설했다.[17] 저격 실패의 교훈을 본받아 총기 메이커들에 반자동 저격소총 설계를 의뢰했다. 발터에서는 WA2000을 개발했지만 채용되지 않았고, 헤클러&코흐가 개발한 PSG-1이 독일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채용되었다.
2012년 독일의 뉴스 잡지 슈피겔은 서독 당국이 학살 3주 전에 베이루트의 팔레스타인 정보원으로부터 제보를 받았다고 보도했다.[17] 그 정보원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올림픽에서 "사건"을 계획하고 있다고 경고했고, 본의 연방 외무부는 이 제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뮌헨의 바이에른 주 비밀 정보국에 전달하며 "가능한 모든 보안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19][20] ''슈피겔''에 따르면, 당국은 이 제보에 대해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이후 40년 동안 이를 인정한 적이 없다.
독일 당국의 준비 부족은 훈련된 검은 9월 단원들과의 총격전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뮌헨 경찰, 바이에른 당국, 서독 당국, 심지어 올림픽 위원회까지 개입하여 혼란과 위기 대처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17] 전후 서독 헌법의 제한으로 인해 육군은 구조에 참여할 수 없었다.[17][53]
뮌헨 학살은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정부로 하여금 "테러리즘을 국제적, 국내적 안보에 대한 지속적인 도전으로 생각하고 광범위한 정부 자원으로 대응하도록" 촉구했다.[17] 이는 독일 연방 국경 경비대의 대테러 개입 부대인 GSG 9의 설립으로 이어졌다.[17]
인질과 납치범이 퓌르스텐펠드브루크 공군 기지에 도착하기 30분 전에 납치범의 수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많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새로운 정보는 무전기가 없는 경찰 저격수들에게 전달될 수 없었다.[54]
저격 작전의 기본 원칙은 첫 번째 일제 사격으로 최대한 많은 공격자를 무력화하기 위해 충분한 저격수를 배치하는 것이다.[55] 헬리콥터는 통제탑 서쪽으로 옆으로 착륙했어야 했지만, 통제탑을 마주보고 활주로 중앙에 착륙하여 저격수들의 사격을 어렵게 했다.
사건 처리 방법을 결정하는 위기 위원회는 브루노 메르크(바이에른 내무 장관), 한스 디트리히 겐셔(서독 내무 장관), 만프레트 슈라이버(뮌헨 경찰청장)로 구성되었다. 슈라이버는 이전 인질극에서 과실 치사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었다.
다섯 명의 경찰 저격수는 서로 간의 무선 연락이 없었고, 구조 작전을 수행하는 독일 당국과의 연락도 없었다.[56] 지상에 있던 두 명의 저격수는 다른 저격수들이 사격을 시작할 때 쏘라는 모호한 지시를 받았다.[57]
경찰 저격수는 이 인질 구출 작전에 적절한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G3 소총은 망원 조준경이나 야간 투시경이 장착되어 있지 않았고, 저격수 중 누구도 강철 헬멧이나 방탄복을 착용하지 않았다.[58][59] 퓌르스텐펠드브루크 공군 기지 현장에는 장갑차가 없었다.[60]
"저격수 2번"은 통제탑에 있던 동료 저격수의 사선에 직접 놓여 총을 쏘지 못했다.[59] 도주하는 범인을 사살했지만, 그를 쏜 것은 동료 경찰관이었다.[61] 헬리콥터 조종사 중 한 명은 아군 사격으로 부상을 입었다.[61]
구조 시도 동안 독일 당국이 저지른 많은 오류는 하인츠 호헨신에 의해 자세히 설명되었다.[43] 727 항공기를 이용한 두 번째 공격 계획에서 비행 승무원인 척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자살 임무라는 것을 이해하고 계획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43]
20일에 서독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보고서는 올림픽 기간 중 잠재적인 테러 공격에 대한 경고가 있었지만, 이스라엘인을 구체적으로 겨냥한 것은 없었다고 언급했다. 테러리스트들의 의도를 고려할 때, 상당한 보안 강화조차도 이스라엘인에 대한 공격을 막지 못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37]
인질 석방 노력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죄수 석방을 거부하여 불가능했다고 결론 내렸다. 공군 기지 작전을 검토하여 작전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지만 경찰에게 잘못이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분데스탁 내무 위원회는 이러한 결론을 채택했으며, 그 결과 징계 조치나 해임은 없었다.[37]
작전에 대한 이스라엘과 독일의 평가가 크게 달라지면서 모사드 수장 자미르와 독일 당국의 보고서 발표 이후 일련의 주장과 반박이 이어졌다. 모르데차이 가지트 외무부 국장은 이 요약본을 메이어에게 보냈다.[37]
자미르는 크네세트 외무 국방 위원회에 보고했다. 그는 서독 당국이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개되는 사건에 맞춰 즉흥적으로 대처하고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설명했다.[37]
2012년 ''슈피겔''은 학살 처리의 미숙함에 대한 많은 정보가 독일 당국에 의해 은폐되었다고 보도했다.[17] 독일은 20년 동안 공격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잡지는 정부가 수만 건의 문서를 포함하는 3,808개의 파일을 숨기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슈피겔''은 독일 관리들의 학살 처리 과정에서 전문성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비밀 보고서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독일 당국이 학살 3주 전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올림픽에서 "사건"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지만 필요한 보안 조치를 취하지 못했으며, 이러한 사실이 독일 정부의 공식 문서에서 누락되었다고 보도했다.[19][104][105][106]
2012년 8월, ''슈피겔''은 학살 이후 서독 정부가 검은 9월단과 비밀 회담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독일 외무부 장관 발터 셰엘과 검은 9월단의 구성원 간의 은밀한 회담을 제안하여 "새로운 신뢰의 기반"을 만들려고 했다. 프랑스 경찰이 뮌헨 학살의 주요 조직자 중 한 명인 아부 다우드를 체포하고 그를 독일로 인도할 것을 요청하자, 독일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말 것을 권고했고, 프랑스는 아부 다우드를 석방했다.[107]
이 사건에서는 다음과 같은 실패가 피해 확대를 초래했다.[133]
이러한 것들 중 많은 부분이 주권주의, 평화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본 기본법상의 제약 때문에, 서독 경찰이 폭탄 등으로 무장한 테러리스트에 대항할 만한 장비를 갖추지 못했고, 또한 훈련도 하지 않았던 점, 그리고 평시의 서독 연방군의 독일 국내에서의 (준)군사 행동이 인정되지 않았던 점에 기인한다.
4. 이스라엘의 보복작전
이스라엘은 뮌헨 올림픽 참사에 대한 보복과 테러 재발 방지를 위해 검은 9월단 암살 작전인 "신의 분노 작전"을 계획했다.[98] 골다 메이어 총리와 고위 각료들로 구성된 비밀위원회가 모사드에 뮌헨 참사 관련자들의 정보 수집을 지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암살 대상을 결정하여 암살 실행을 지시했다.[99]
이 사건에 대해 이스라엘 정부는 보복으로써 공군에게 팔레스타인 게릴라 기지를 포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로 인해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살해되었다.
골다 메이어는 다른 국가들에게 "우리 시민들을 구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범죄 행위를 규탄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녀는 또한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 양보한다면, 세상 어디에도 있는 이스라엘인은 자신의 생명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는 최악의 협박이다."라고 말했다.[97]
메이어와 이스라엘 국방 위원회는 뮌헨 학살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추적하여 살해하는 것을 비밀리에 모사드에 위임했다.[98] 모사드는 유럽 내 기관들의 지원을 받아 이 페다인들을 찾아 살해하기 위해 여러 특별팀을 구성했다.[100]
베니 모리스는 "전향한" PLO 요원과 우호적인 유럽 정보 기관의 정보를 사용하여 목표 목록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일단 완료되면 유럽 전역에서 검은 9월 요원이라는 의심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일련의 암살이 시작되었다. 1973년 4월 9일, 이스라엘은 청춘의 샘 작전을 시작했는데, 이는 베이루트에서 모사드와 이스라엘 방위군(IDF)의 합동 작전이었다. 모리스에 따르면, 표적은 검은 9월을 운영하는 파타 정보부의 수장인 모하마드 유수프 알-나자르(아부 유수프), 이스라엘 내부의 PLO 활동을 통제하는 PLO 서부 지구의 수장인 카말 아드완, 그리고 PLO 대변인 카말 나시르였다. 9척의 미사일 보트와 소규모 순찰선으로 구성된 그룹이 버려진 레바논 해변으로 이동한 후, 두 대의 차를 타고 베이루트 시내로 이동하여 나자르, 아드완, 나시르를 살해했다. 두 개의 추가 특공대가 베이루트의 PFLP 본부와 파타 폭발물 공장을 폭파했다. 작전을 수행한 특공대 팀의 리더는 에후드 바라크였다.
1973년 7월 21일, 릴레함메르 사건에서, 모사드 요원들은 정보 제공자가 알리 하산 살라메라고 잘못 말하는 바람에, 뮌헨 공격과 무관한 모로코인 아흐메드 부치키를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실수로 살해했다.[101] 두 명의 여성을 포함한 5명의 모사드 요원이 노르웨이 당국에 체포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도주에 성공했다.[98] 5명은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지만, 1975년에 석방되어 이스라엘로 돌아갔다. 모사드는 나중에 베이루트에서 알리 하산 살라메를 찾아 1979년 1월 22일 원격 조종 자동차 폭탄으로 살해했다. 이 공격으로 4명의 행인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102]
검은 9월도 반격을 시작하여, 모사드의 공작원, 협력자 등을 살해했다. 1972년 11월 13일, 모사드의 정보 제공자인 파리 거주 시리아인 저널리스트가 사살되었고, 이듬해 1월 26일에는 모사드 공작원 발크 코헨이 마드리드의 번화가에서 사살되었다.
4. 1. 신의 분노 작전
이스라엘은 뮌헨 올림픽 참사에 대한 보복과 테러 재발 방지를 위해 검은 9월단 암살 작전인 "신의 분노 작전"을 계획했다.[98] 골다 메이어 총리와 고위 각료들로 구성된 비밀위원회가 모사드에 뮌헨 참사 관련자들의 정보 수집을 지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암살 대상을 결정하여 '바요넷'이라 불리는 모사드 내부 부대에 암살 실행을 지시했다.[99]최초의 암살 대상은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의 사촌이자 번역가인 와엘 즈와이테르로, 1972년 10월 16일 로마 자택에서 사살되었다.[152] 이후 모사드는 검은 9월단의 브레인이었던 마흐무드 함샤리 박사를 1972년 12월 8일 파리에서, PLO와 소련KGB의 연락 장교였던 후세인 아바트 아 쉴을 1973년 1월 24일 키프로스 니코시아에서 폭사시키는 등, 총이나 원격 조작 폭탄으로 표적을 암살했다.
검은 9월단도 반격하여 모사드 정보 제공자와 공작원을 살해했다. 1972년 11월 13일에는 파리 거주 시리아인 저널리스트가, 1973년 1월 26일에는 모사드 공작원 발크 코헨이 마드리드에서 사살되었다.
1973년 4월 9일, 이스라엘군과 모사드는 베이루트에 있던 PLO와 검은 9월단 간부들의 아파트를 기습하여(청춘의 샘 작전) PLO 공식 대변인 카말 나세르, 검은 9월 간부 유세프 나자르 및 카말 아드완 등 3명을 살해했다.[99] 이 작전에는 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되는 에후드 바라크가 여장을 하고 참여했다. 1973년 6월 28일에는 검은 9월의 유럽 책임자 모하메드 부디아가 파리에서 차량 폭탄으로 사망했다.
모사드는 1973년 7월 21일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뮌헨 참사의 배후로 지목된 알리 하산 살라메를 암살하려 했으나, 무고한 모로코인을 오인 사살하는 릴레함메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모사드 공작원 5명이 체포되었고, 유럽 각국은 이스라엘의 행동에 우려를 표명했다.
모사드는 영국 여성 공작원 에리카 챔버스를 통해 알리 하산 살라메의 정보를 수집, 1979년 1월 22일 베이루트에서 차량 폭탄으로 그를 살해했다. 이로써 신의 분노 작전은 종결되었다.[102]
이스라엘과 모사드는 신의 분노 작전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으나, 2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원이 암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5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뮌헨은 이 작전에 관련된 공작원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나, 이스라엘 정부 및 모사드 전 고위 관계자 등은 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152]
5. 사망자 명단
이름 | 나이 | 직업 | 국적 |
---|---|---|---|
모셰 웨인베르그 | 32 | 레슬링 코치 | |
요세프 로마노 | 32 | 역도 선수 | |
제브 프리드만 | 28 | 역도 선수 | |
다비드 베르게르 | 28 | 역도 선수 | |
아코브 스프링게르 | 51 | 역도 심판 | |
엘리에제르 할핀 | 24 | 레슬링 선수 | |
요세프 구트프로인드 | 40 | 레슬링 심판 | |
케하트 쇼르 | 53 | 사격 코치 | |
마르크 슬라빈 | 18 | 레슬링 선수 | |
안드레 스피체르 | 27 | 펜싱 코치 | |
아미추르 샤피라 | 40 | 육상 코치 | |
안톤 플리게르바우어 | 32 | 경찰관 | |
루피프 아피프 | 27 | 검은 9월단 멤버 | |
유수프 나잘 | 35 | 검은 9월단 멤버 | |
아피프 아메드 하미드 | style="text-align:center;"| | 검은 9월단 멤버 | |
칼리드 자와드 | 18 | 검은 9월단 멤버 | |
아메드 치크 타 | style="text-align:center;"| | 검은 9월단 멤버 |
모셰 와인베르크와 요세프 로마노는 침입 당시 총격으로 사망했다. 동쪽 헬리콥터 D-HAQO에서는 제브 프리드먼, 다비드 베르게르, 야코브 스프링어, 엘리에제르 할핀이 수류탄에 맞아 사망했다. 다비드 베르게르는 수류탄 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연기에 질식사했다. 서쪽 헬리콥터 D-HAQU에서는 요세프 구트프로인드, 케하트 쇼르, 마크 슬라빈, 안드레 스피체르, 아미추르 샤피라가 총격으로 사망했다.
총격전 중 통제탑에서 서독 경찰관 안톤 플리게르바우어가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는 1963년 바이에른 주 경찰에 견습으로 들어갔으며, 1970년 뮌헨 시 경찰에 배치되어 ''폴리차이오버마이스터''(경사) 계급으로 임명되었다.[119] 그는 총격전 중 인질범이 쏜 빗나간 총알에 머리 측면에 명중하여 사망했다. 2012년 퓌르스텐펠트브루크 공군 기지에서 열린 뮌헨 대학살 40주년 추도식에서, 플리거바우어는 테러리스트에 의해 살해된 이스라엘 대표단 11명과 함께 추모되었다.[121]
검은 9월단 멤버인 루티프 아피프, 유수프 나잘, 아피프 아흐메드 하미드, 칼리드 자와드, 아흐메드 치크 타아는 서독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6. 관련 작품
뮌헨 올림픽 참사에 대한 묘사에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 ''1972'', 사라 모리스 감독의 영화
- ''21 Hours at Munich'', 1976년 TV 영화
- ''뮌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05년 미국-캐나다 영화
- ''Munich: Mossad's Revenge'', 영국의 채널 4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 ''9월의 어느 날'', 케빈 맥도널드 감독의 1999년 다큐멘터리; 아카데미상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수상작
- ''프리폰테인'', 스티브 프리폰테인의 1997년 전기 영화로, 1972년 올림픽 기간 중 발생한 학살 사건을 묘사
-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Seconds From Disaster'' 에피소드
- ''9월 5일'', ABC 스포츠의 학살 사건 보도를 극화한 2024년 영화
- ''Sword of Gideon'', 캐나다 텔레비전 영화
- ''Visions of Eight'', 미국 다큐멘터리
- ''Munich 1972 & Beyond'', 스티븐 언거라이더 감독의 2016년 다큐멘터리 영화
- ''이스라엘의 피'', 세르주 그루사르의 1975년 저서 (원서는 1973년 ''La médaille de sang''으로 출판)
-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충격의 순간 4 제3화 "뮌헨 올림픽 사건"
- [https://www.nhk.jp/p/anotherstories/ts/VWRZ1WWNYP/episode/te/GG5G94Q71K/ Another Stories 운명의 분기점] 뮌헨 올림픽 테러 사건 "평화의 제전"은 계속 질문한다 ('''방송일: 2024년 3월 15일''' )
6. 1. 서적
- Calahan, A. B. (1995 Thesis) [http://www.fas.org/irp/eprint/calahan.htm "The Israeli Response to the 1972 Munich Olympic Massacre and the Development of Independent Covert Action Teams"]
- Cooley, John K. (London 1973), ''Green March Black September: The Story of the Palestinian Arabs''
- Dahlke, Matthias (Munich 2006), ''Der Anschlag auf Olympia '72. Die politischen Reaktionen auf den internationalen in Deutschland'' Martin Meidenbauer (German text)
- Daoud, M. (Abu Daoud) (New York, 2002)
- Groussard, S. (New York, 1975), ''The Blood of Israel: the massacre of the Israeli athletes, the Olympics, 1972''
- Jonas, George. (New York, 2005), ''Vengeance: The True Story of an Israeli Team.", Simon & Schuster
- Khalaf, Salah (Abu Iyad) (Tel Aviv, 1983) ''Without a Homeland: Conversations with Eric Rouleau''
- Klein, A. J. (New York, 2005), ''Striking Back: The 1972 Munich Olympics Massacre and Israel's Deadly Response'', Random House
- Morris, Benny. (New York, 1999 and 2001), ''Righteous Victims: A History of the Zionist–Arab conflict, 1881–2000'', Vintage Books edition
- Reeve, Simon. (New York, 2001), ''One Day in September: the full story of the 1972 Munich Olympic massacre and Israeli revenge operation "Wrath of God"''
- Tinnin, David B. & Dag Christensen. (1976), ''The Hit Team''
- Yossi Melman (February 17th 2006), Interview with Head of Mossad, "Preventive measures" By Yossi Melman [https://web.archive.org/web/20071001050309/http://www.haaretz.com/hasen/pages/ShArtStEng.jhtml?itemNo=683846&contrassID=1&subContrassID=1&title=%27title%27 "Haaretz.com"]
뮌헨 올림픽 참사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은 서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이스라엘의 피/The Blood of Israel영어, 세르주 그루사르의 1975년 저서 (원서는 1973년 ''La médaille de sang''으로 출판)
- 조지 조나스, 《표적(타겟)은 11명: 모사드 암살팀의 기록》, 신조 테츠오 역. 1986.7 신초샤
- 데이비드 티닌, 《암살팀》, 타카다 마사즈미 역. 슈에이샤, 1978
- 마이클 바르-조하르, 아이탄 하버 공저, 《뮌헨: 올림픽 테러 사건의 배후를 쫓다》, 요코야마 히로아키 역, 하야카와 문고 NF, 2006년
- 아론 J. 클라인, 《뮌헨 검은 9월 사건의 진실》, 토미나가 카즈코 역, 카도카와 문고, 2006년
6. 2. 영화
뮌헨 올림픽 참사를 다룬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사라 모리스 감독의 영화 ''1972''
- 1976년 TV 영화 ''21 Hours at Munich''
-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05년 미국-캐나다 영화 ''뮌헨''
- 영국의 채널 4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Munich: Mossad's Revenge''
- 케빈 맥도널드 감독의 1999년 다큐멘터리 ''9월의 어느 날''; 아카데미상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수상작이다.
- 스티브 프리폰테인의 1997년 전기 영화 ''프리폰테인''
-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Seconds From Disaster'' 에피소드
- ABC 스포츠의 학살 사건 보도를 극화한 2024년 영화 ''9월 5일''
- 캐나다 텔레비전 영화 ''Sword of Gideon''
- 미국 다큐멘터리 ''Visions of Eight''
- 스티븐 언거라이더 감독의 2016년 다큐멘터리 영화 ''Munich 1972 & Beyond''
- 세르주 그루사르의 1975년 저서 ''이스라엘의 피'' (원서는 1973년 ''La médaille de sang''으로 출판)
마크 포드왈의 "뮌헨 학살"은 1972년 ''뉴욕 타임스''에 게재되었다.
7. 한국의 대응 및 영향
7. 1. 경찰특공대 창설 및 강화
7. 2. 707 특수임무대대 강화
7. 3. 대테러 장비 도입
7. 4. 국제 협력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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